끝나지 않는 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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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왜란
  • 오명하 기자
  • 승인 2019.08.1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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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병현 칼럼리스트
사진=최병현 칼럼리스트(본사 전임 칼럼리스트)

[코리아안전뉴스]  칼럼

일본과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설마 자위대 수준의 군사력을 가진 일본과, 70여 년 동안 국방력 증강에 온 힘을 기울여온 대한민국인데, 우리에게 승산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얼마 전 초계기 사건을 계기로 분석한 언론 자료에 따르면 항공기, 미사일, 함정 등 첨단 군사무기 면에서 우리나라의 군사력 수준은 일본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문득 42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의 활과 조총의 전쟁 장면이 연상된다.

악연도 이렇게 질긴 악연은 없다. 신라의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수중에서 왜구로 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그날 이후, 장구(長久)한 세월을 보내고도 아직도 왜란(倭亂)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 더구나 전범국가 일본이, 전쟁할 수 없는 나라라는 족쇄에서 벗어난다면, 한반도는 또다시 격랑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만의 걱정일까?

일본은 현재까지도 군국주의 역사의 영광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첫 번째 정한론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을 통일시킨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받는다. 아시아 침략에 앞장서 두 번째 정한론을 실현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의 개국공신이며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추앙된다. 뿐만 아니다. 매년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전범들을 추모하고 영웅시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린다. 미래의 전범들을 만들고 교육하는 셈이다.

어느 날부터인지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둔갑했다.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되어 전쟁터로 끌려 다니던 소녀들의 피눈물과 고통은 없고 “불가역적 위안부 협상”만 있을 뿐이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된 강제 징용공에 대한 비인도적인 범죄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보상하였다고 자기식의 논리로 둘러대고 한국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고 몰아세운다. 오직 자신들의 추악한 행위를 합리화 하고, 기억에서 지우려 할 뿐이다.

아베신조 일본 총리는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2007년)라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뿐만 아니다. “중국은 어처구니없는 국가지만 아직 이성적인 외교 게임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은 단지 어리석은 국가다”(주간문춘(週刊文春), 2013.11)라고 능멸한다. 이것이 일본의 현 정권이 가지고 있는 대(對) 한국관의 밑바탕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화해가 가당키나 할까?

“역사에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판단과 결합되어 있는 것”(역사란 무엇인가, E•H•CARR)이다. 그들이 자행한 살인과 방화, 가장 인간다운 권리조차 유린한 위안부, 강제징용도 기만하고 꾸며댄다. 가해의 역사는 잊고 피해의 역사만 기억한다. 인류보편의 인권존중과 한국에 대한 역사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일본의 침략근성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경제 선진국이라 하여도 우리에게는 한갓 왜적(倭賊)이며, 왜구(倭寇)일 뿐이다.

세 번째의 정한론(征韓論)

오늘날 전쟁은 무력으로 하지 않는다. “경제와 외교력을 통해 한나절이면 한국 정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본 언론과 우익들의 경제정한론(經濟征韓論)이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만큼 한국기업의 일본 소재 부품의존도는 뿌리가 깊고 넓다. 또 많은 국내기업들이 일본의 금융기관에서 엔(円)화를 빌려 쓰고 있다. 한국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는 셈이다.

일본이 기술패권주의와 막대한 자본력으로 한국시장을 흔들어,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고 서민경제를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미끼로 한국의 굴종을 강요한다. 이는 먹고사는 문제가 일본이 노리는 한국경제의 ‘뇌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급한 생존을 위해 알량한 자존심과 지조, 명예, 민족과 국가 따위는 거추장스러울지 모른다. 이것이 경제 종속화의 민낯이다.

설사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드높은 지조를 지켜내려 하여도, 국민들의 불만을 버텨내기엔 역부족이다. 일본이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대척점에 서 있는 한국내부의 정치세력과 내밀하게 검은 거래를 한다. 마침내 친일정권이 들어서고 삼류의 한국 정치를 주무를 수도 있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으며 찬연했지만 한국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일본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노부유키’가 조선을 떠나면서 남긴 저주의 말이다.

경제와 정치의 종속화는 마침내 의식(意識)의 종속화로 정점에 다다른다. 의식은 언어와 행동을 지배하는 주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다. 경제적•정치적 속박은 정신만 차리면 다시 되짚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이 지배당하면 자립•자존의 희망조차 버리고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

식민사관은, 깨끗하고 논리적이며 예의 바른 일본인과, 게으르고 감정적이고 타율적인 한국인을 분리(分離)해 낸다. 엽전은 맞아야 하고, 팽이는 때려야 돌아간다. 한국인은 모래와 같이 흩어지고 이간질 하며 잘 분열한다. 일본은 가짜뉴스와 농객(弄客)들을 내세워 끊임없이 갈등과 열등의식, 무력감을 부추긴다.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째이다. 일본은 경제력과 외교력을 앞세워 세번째 정한론(征韓論)을 시작하였다. 한국 국민들에게 버티다가 죽든지, 항복하든지 양자택일을 겁박한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다시 시작한 침략이다. 그들의 분탕질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삼천리강산에 울려 퍼진 3.1운동, 맨손 빈 몸뚱이로 처절하게 싸워야 했던 민초들의 장엄한 울림과 함성, 조국을 찾겠노라, 육혈포로 침략의 원흉을 저격하고, 도시락폭탄으로 하나로 목숨과 맞바꾼 선조들의 피 맺힌 한(恨)이, 오늘 삼천리강산에 요동친다. 조국 미래를 염려하는 작은 뜻과 마음 하나도 극일(克日)의 독립운동이다.

피할 수 없으면 당당히 맞서라! 그리고 이겨라. 고통을 감내할 때 굴종(屈從)의 쇠사슬은 끊어진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자주, 자립, 자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그들이 넘볼 수 없는 통곡의 강을 건너, 천만년 행복한 평화의 나라,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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